▲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미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변영태).  On October 1, 1953,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signed a Mutual Defense Treaty. (출처 : https://kr.usembassy.gov)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미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변영태).  On October 1, 1953,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signed a Mutual Defense Treaty. (출처 : https://kr.usembassy.gov)

당시 휴전을 원하고 있던 미국의 카드는 이승만 제거의 에버레디 계획(Plan Eveready)이나 아니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버레디 계획은 6.25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을 연금,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유엔군사령부가 극비리에 수립한 작전 계획이다.

한국은 백척간두에 선 최대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때 에버레디 계획을 반대한 사람이 미 국무장관으로 이승만의 절친인 그의 조지 워싱턴대와 프린스턴대 동기인 덜레스(John Foster Dulles)였다. 그는 한국에서 미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명분에 어긋나는 어떤 계획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으로 충격을 받고 달려온 미대통령 특사 월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에게 지난날 한미수호조약을 지켜 주지 않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양도한 사실을 말하면서 저들의 실책과 배신행위를 물고 늘어졌다. 이승만의 이 지적은 가쓰라-테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이는 1905년 7월 29일 맺어진 밀약으로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장관 테프트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을 합의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조약)이라는 비극과 함께 사실상의 국권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승만은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이행하지 않았던 미국의 실책을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승만의 이야기는 로버트슨을 침묵하게 만든다. 이 땅 위에 그 어떤 정치가도 세계 최강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를 이렇게 몰아 부칠수는 없었다.

191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망명 생활과 그 이전의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의 수학으로 얻어진 그의 능통한 영어 실력과 국제정치에 정통한 미국의 정치가 보다 더 미국 정치에 정통한 미국 전문가인 이승만을 그는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로버트슨은 7월 1일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로 자신의 국가를 자살행위로 몰고 갈 만한 비논리적 늙은이라면서 그래도 분명한 것은 반공주의자이기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서한을 보낸다.

이미 트루먼 독트린으로 대소련 봉쇄정책에 나선 미국은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사건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령이 강화된 후여서 두 주간의 밀고 당기는 회담을 마치고 이런 말을 남긴다. “남한이 아시아 민주주의 전시장이 되도록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한국을 떠난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수 없는 난항을 겪는다. 미국은 평화적으로 휴전하고 저들과 대화 통일한다는 것이었고 이승만은 전쟁터에서 쟁취하지 못한 것을 회담 탁자 위에서 공산당과의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미국무장관 덜레스와 대통령 이승만은 계속 맞서고 있었다. 

당시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한 안건들은 첫째,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둘째,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여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 셋째,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넷째,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때 이 회담에서 탈퇴 별도의 대책을 세워나간다. 다섯째,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1953년 8월 8일 서울 경무대에서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뒤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관했다. (사진 = 위키백과)
▲1953년 8월 8일 서울 경무대에서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뒤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관했다. (사진 = 위키백과)

한미 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8월 8일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다. 덜레스 미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에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면서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했다. 이로써 북진통일의 꿈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미동맹을 맺으며 70만 대군의 아시아 군사 강국의 발판을 마련했다.

8월 9일 대통령 이승만은 우리의 후손들은 수대에 걸쳐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1953년 10월 1일 당시 외무장관으로 시인 변영로의 형인 변영태와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하면서 지금껏 한반도는 68년 동안 전쟁 없는 곳으로 지나온 것이다.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가 비준절차를 마쳤고 미국 양원은 1월 26일에 비준한다. 그리고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됐으며 한국(남한) 방위를 위해 외국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서는 최초이며 지금까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 어느 한쪽이 적에게 공격을 받을 경우 상호협의하여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2조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각자의 헌법상의 구속에 따라 행동할 것이 그것이다.

이 두 조항만 보면 북한의 남침시 미군이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제4조에 보면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데 상호합의에 의해 미합중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락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는 조항이다. 

휴전 후 미국은 이 조항에 따라 미군을 이 땅 위에 주둔시켰고 제2사단을 서부전선에 배치했다. 이는 북한이 기습남침할 경우 미군이 공격을 받게 될 때 미국 대통령은 의회 승인 없이 자동적으로 참전하게 했는데 이것이 인계철선이다. 

원래 인계철선(引繼鐵線, tripwire)은 폭발물에 연결되어 적이 폭발물을 건드리면 폭발하게 하는 철선으로 주한미군과 관련된 중요 군사 용어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주둔해 있는 주한미군은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계철선은 수동적 기폭 메커니즘이다. 이는 물리적 움직임을 인식하거나 움직임에 반응하는 장치에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뢰나 부비트랩을 설치할 때 인력에 의한 발화작용을 돕기 위해 설치하는 철선 또는 인력을 발화장치에 전달하기 위한 철선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놓고 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빌미로 미국의 발목을 단단히 잡은 것으로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 전초기지가 되었고 이 땅의 종북세력들은 지금도 김일성의 국토완정(國土完整)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피로 지켜온 이 강산을 적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당시 이 땅 위에 그 어떤 정치인도 이룰 수 없는 이승만의 외교술의 승리였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해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면서 미국의 고압적인 정치행태에 맞섰다.

인간관계의 달인이었던 이승만은 미군정 치하에서 하지와는 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의 절친 맥아더와는 계속 교제를 나누었고 전시 중에는 무초대사를 황당케 했지만, 미군 장성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앞날을 예견해 나갔다. 

한미동맹은 동아시아에 60여 년간 전쟁이 없는 지역으로 만든 쾌거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한국전쟁 등 계속되는 전쟁이 1953년 7월 27일로 종결되면서 세계가 가장 불안해하는 한국에서 전쟁의 뇌관을 제거한 것이었다.

 

▲이종찬 목사 (역사신학 Ph.D).
▲이종찬 목사 (역사신학 Ph.D).

이종찬 목사(역사신학 Ph.D.)

경기도 용인 수지 출생. 월간 「시사문단」 시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사문단작가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빈여백 동인, 월간 「문학21」 수필로 등단했다.

▲시집 : 「부활의 계절」(2011 그림과책), 「빛을 노래한 사람」(2014 그림과책), 「보아라 저 붕새의 힘찬 날갯짓을」(4인 공저), 「지독한 사랑」(3인 공저), 「봄의 손짓」(제8, 11호 공저), 「은총의 샘물」(2016 그림과책), 「꽃중의 꽃」(2017 그림과 책).

▲저서 : 「노블레스 오블리제」, 「북동구 개혁교회 역사기행」, 「땅끝에서 길을 묻다」, 「제3의 로마방문기」, 「총회 100주년사」(6인 공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들」(2015 킹덤북스), 「20세기 탁월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2015 킹덤북스), 「제2차 대각성주역 찰스피니」(2015 킹덤북스).

▲문학21문학상(수필. 2005) ▲美에피포드 예술협회 문학대상(수필. 2005) ▲수원고 개교 100주년 기념 시서시화전(2009) ▲효석문학상 본상(2010) ▲제8회 빈여백동인문학상(2013) ▲제11회 시사문단문학상 대상(2014) ▲제13회 풀잎문학상 대상(2016) ▲제8회 북한강 문학상 본상(2018) ▲제15회 독도예술제 시부문 대상(해양수산부 장관상. 2019).

수원고등학교 졸업, 한국성서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호서대학교(Th.M./Ph.D.), 호서대학교 객원교수, 칼빈대학교 외래교수, 총회부흥사회 증경회장, 한국기독교 부흥협의회 사무총장·연수원장, 기독신문 논설위원, 수원노회 증경노회장, 총회100주년사 집필위원, 중국동성진중학교 명예교장, 경기도 청소년 종합예술제 산문 부문 심사위원, 전 기독신문 주필.

현, 수원 권선제일교회 담임목사(38년째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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