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역사신학PhD)

매년 11월 셋째 주가 되면 한국 교회는 추수감사절로 지킨다. 지금 우리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북미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순례시조들인 필그림과 역사적인 폴리머스 정착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북미대륙 최초의 정착촌은 버지니아주에 세운 제임스타운이다. 그러나 제임스타운은 인디언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로 300명씩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경험해야 했다. 결국, 제임스타운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했고 무너지면서 대신 그 근처에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가 세워졌다.

당시 영국은 국교회가 주류였기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와 갈등이 계속 심화 되고 있었다. 당시 영국 국교회와 커다란 마찰들 속에 고난을 겪던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주교제도와 중세 전통을 거부하고 있었다. 1607년 국왕 제임스는 국교회 예배 때 참석하지 않는 국민들 특히 청교도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구금하면서 저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핍박을 견디기 힘들었던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갔다가 다시 미 대륙으로 향했는데, 우리는 이들을 필그림(pilgrim)이라고 부른다. 이 그룹은 존 로빈슨(John Robinson 1575-1657) 목사와 윌리엄 브레드 포드(William Brad ford 1589-1657)가 이끄는 그룹이었다. 1620년 1차로 당시 31살의 윌리엄 브레드 포드를 포함한 35명의 청교도들이 먼저 대서양을 건넜고 나머지 일행은 추후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저들은 1620년 청교도 35명과 함께 신대륙으로 향하는 또 다른 67명과 함께 영국의 폴리머스(plymouth)를 출발했다. 

윌리엄 브레드 포드는 이방인들(Strangers)과 순례자들(pilgrim)이라는 신약 성경구절인 히브리서 11장 13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을 필그림, 순례자라 하였고, 미국 북미의 청교도 공동체를 이룬 102명의 선조들을 필그림(pilgrim)으로 부르게 되었다. 필그림(pilgrim)은 통과라는 뜻의 의미인 per(퍼르)와 땅을 뜻하는 ager(아게르)의 합성어로 퍼르아게르에서 나온 단어이다. 

1620년 9월 6일 필그림들은 메이플라워(Mayflower)호에 승선하여 고난의 항해를 시작한다.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꼬박 두달이 걸린 머나먼 항해였다. 저들은 천신만고 끝에 11월 10일 메사주세츠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하면서 저들이 처음 떠나온 영국의 항구 이름을 따 풀리머스라고 불렀다. 이들은 육지에 내리기 전 메이플라워 서약(the Mayflower Compact)이라는 헌법에 해당하는 서약에 서명하였다. 

필그림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이 전염병 때문에 버리고 떠난 거주지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저들 청교도들이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는데, 북미대륙의 추운 겨울이었다. 12월부터 3월 말까지 혹독한 추위는 102명 중 절반 이상의 죽음을 앗아갔다. 청교도 공동체는 제임스타운과 같은 곤고한 모습을 닮으며 소멸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 풀리머스 공동체는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제임스타운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존자 50명 중 건강한 이들이 6, 7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뜨거운 헌신으로 풀리머스 공동체는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을 때 인디언이 나타났는데 청교도들에게 웰컴(welcome)이라는 영어를 하고 있었다. 사모셋(Samoset)이라는 인디언이었다. 그는 다음날 자신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스콴토(Sqanto)라는 동료 인디언을 데리고 와 청교도 공동체를 도왔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귀인들이었다. 저들 사모셋과 스콴토는 이곳을 지나는 영국 상선들과 교류하며 영어를 배운 인디언들이었다. 이들은 청교도들에게 곡식 종자를 주었고, 농사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약초를 나누어 주어 저들 생존을 도왔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공동체인 풀리머스 정착촌(plymouth plantation)은 생존할 수 있었다. 

저들 공동체는 매주 예배를 드리며 생존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저들이 사모셋과 스콴토의 도움으로 정착한 그해 11월 풀리머스 공동체는 마사소이트(Massasoit) 추장과 90명의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추수감사의 축제를 지켰다. 저들의 감사는 1년 농사가 아닌 자신들을 죽음에서 생존케 하신 신령한 영적 감사였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다. 

미국이 1789년 4월 30일 건국되고 제16대 대통령이던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게티즈버그(Gettys Burg) 전투 직후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하였고 이후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저들 청교도들이 지킨 추수감사절의 전통에 따라 매년 11월 셋째 주일로 지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추수감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구원받아 지금도 생존이라는 은총 속에 사는 것에 대한 감사임을 잊지 말자. 항상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골로새서 2:7) 그런 삶으로 살면서 언제나 감사의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정신임을 잊지 말자.


 

▲이종찬 목사 (역사신학 Ph.D).
▲이종찬 목사 (역사신학 Ph.D).

이종찬 목사(역사신학 Ph.D.)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호서대학교(Th.M./Ph.D.), 호서대학교 연구교수 총회부흥사회 대표회장 역임, 전 기독신문 주필. 현, 수원 권선제일교회 담임목사.
▲저서 : 「노블레스 오블리제」, 「북동구 개혁교회 역사기행」, 「땅끝에서 길을 묻다」, 「제3의 로마방문기」, 「총회 100주년사」(6인 공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들」(2015 킹덤북스), 「20세기 탁월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2015 킹덤북스), 「제2차 대각성주역 찰스피니」(2015 킹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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