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자네를 눈물로 영별永別한 지 딱 일주일만이네.

황황히 간 길은 ‘목적지’에 잘 도착했는가? 이제 영면永眠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은 이승에 미련이 남아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는가? 환생을 앞둔 신세계이든가? 나훈아의 노랫말이 생각나네. “(벽곡)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 참으로 무상하고 무심, 무정한 게 달구름(세월歲月)이네그려. 멘붕의 주말이 지나고, 어제 올 농사 마지막 작업인 타작한 콩들을 선별하여 정부에 수매를 했다네. 농사정보를 많이 주고받았던 자네이니만큼 올해 농사를 보고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 이 새벽에 편지를 쓰네.

 

결론부터 말하겠네. 초보 농사꾼이 내가 이모작二毛作하겠다고 하니 놀라며 말렸지. 멀쩡한 논에 옥수수(깡냉이)를 심고 수확하기 일주일 전쯤인 7월 초순 옥수수 사이사이(30cm)에 콩알 두세, 네댓 알씩을 일일이 심었지. 솔직히 힘들더군. 스물다섯 고랑(80m×25m)에 자원봉사 친구 두세 명과 심고, 추이를 지켜봤는데, 다행히 거의 싹이 나왔다네. 그런데 문제는 때까치들이 몽땅 파먹는 거네. 그래서 다시 심는, 이중의 작업.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농부가 어찌 그런 시련에 그만둔단 말인가. 옥수수는 그런대로 평년작은 되었네. 자네에게도 겨우 30여 개 안겼지만, 150상자나 팔았다네. 계산해 보니까 택배비와 그간 들어간 재료비 제하니 150만 원은 남는 것 같더군. 물론 거기에 내 인건비는 없으니, 하나마나한 것이지.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한없이 뿌듯하더군. 내가 '몸 팔아' 번 소중한 돈, 안경도 맞추고, 모처럼 아내에게 용돈 50만 원도 주었다네. 

 

그래서 콩은 얼마나 벌었다고? 그게 궁금하겠지. 옥수수 멀칭비닐에 심으니까 콩값 5만 원 말고는 재료비로 크게 들어간 것은 없네. 고랑과 두럭 제초 두어 번, 농약 두어 번, 탈곡기 대여 등 소소한 것들이 다 합하면 20여만 원. 나머지는 몽땅 온몸으로 때우는 작업들. 난생처음 풀과의 전쟁을 치르며 혀를 내두른 게 무릇 기하였다네. 정말 지긋지긋하더군. 아니, 인간의 탈을 쓰고 하지 못할 작업이 농업이긴 하지만, 언젠가도 말했지만, 도를 닦는 마음으로 꾸준히 할 수 밖에 없는 작업. 일꾼을 얻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비싼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리하여 그제(금요일) 오전, 갖은 우여곡절 끝에 농협에서 그 많은 콩(40kg 20가마)을 기계로 선별하니, 대大(1등급, 아주 굵은 콩) 40kg 15가마(600kg)가 나오더군. 고약한 것은 작년에는 1kg에 5,300여 원이었는데 올해는 4,850원으로 내렸다네. 기름, 비료, 농약값 등은 대폭 뛰었는데 쌀과 타작물들의 값이 내린 게 문제이지. 말하자면 농부를 두 번 죽이는 셈이야. 금세 계산해 봤겠지. 총 291만 원. 300만 원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래도 다행이지 무언가. 옥수수 수입과 합하면 1필지(3마지기 600평)에서 450만 원은 대단한 것이네. 나에게 이모작을 추천한 내 고향친구를 자네도 본 적 있지. 그 친구는 1000평(5마지기)에 똑같이 콩을 심었는데, 1등급 2개, 2등급 13개로 같이 15개가 나왔지만, 수매값은 40만 원쯤 차이가 나네. 그 친구보다 적은 면적으로 더 많은 수확을 냈으니 '대박'이라면 대박이지 않는가. 논(쌀)농사는 “똔똔(쎔쎔”이라고 보면 되는 것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직불금이 없으면 적자赤字이지 않던가. 일곱 살 손자의 호출로 그제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와, 어제 꼬맹이에게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갈 때 “할래비가 학자금으로 100만 원 줄게”하니까 “금이 먼데?”라고 물더군. “금? 금이 금일봉이야”라고 대답하니까 “금일봉은 또 머야?”라고 말해 식구들이 모두 웃었다네. 금(金)이 뭘까? 단순한 쇠붙일까? 우리 생활에 가장 유용한 수단일까?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재미이거늘, 자네는 그 ‘재미’를 보지 못했으니, 다시금 마음이 아프네.

 

옥수수도 그랬지만, 콩을 베면서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 새떼들의 피해를 막으려 동분서주했던 일, 너무 가물어 윗논의 물꼬를 터 물을 몽땅 주고 막던 일, 고랑고랑 풀을 예초기로는 할 수 없으니 일일이 뽑던 일, 낫으로 하나하나 베어 넘겨 말리던 일, 일주일 후 그 콩들을 잘 마르라고 뒤집어놓아야 했던 일, 콩타작하려고 콩단을 모으고 기계에 밀어주고, 콩깍지들을 갈퀴로 긁어 한 곳에 쌓아놓고, 40kg 푸대를 들어 집으로 옮기고, 수분이 많다고 선별장에서 빠쿠당할까봐 마음 죄이던 일, 선별기에 그 많은 콩알들을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밀어 넣던 일, 등등등등. 친구 그 많은 과정이 일이 마침내, 결국, 드디어 다 끝났네. 손에 쥐어지는 돈이 적다고 불평 불만할 때가 아니네. 내가 처음으로 이모작을 하여 실패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자네처럼 저돌적으로 농사일을 덤벼본 사람은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걸세. 그래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니, 자네가 맨 먼저 생각한 까닭이라네.

 

친구, 엊그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치른 자네 아들이 추모실(납골당) 사진을 보내왔더군. 사진 석 장을 한참을 들여다봤네. 탁구 등 운동을 즐겼던 자네는 고향에서도 명성을 날리며 아줌마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지. 그 자랑에 자네 고향 탁구클럽에 한두 번 가보기도 했거늘. 늘 밝은 얼굴로, 씩씩한 목소리로, 주변을 환하게 해주던, 남을 배려하던 이타심利他心의 화신인 자네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그곳에 이미 영원한 자리를 잡았는가? 아니면 천형天刑처럼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가?

이제는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이네. 내일모레가 소설小雪이니 머지않아 눈도 내리겠지.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네. 낮에도 패딩을 입어야 할 만큼 날씨가 추워졌으니 이제 겨울이지 않은가. 눈이 또 많이 오면 자네가 없는데 또 어떡하지? 바래봉 정상을 발목이 푹푹 빠지며 올랐던 기억, 다음에 오를 때에는 비닐포대를 한 장씩 갖고 와 썰매를 타자고 동심童心이 되어 즐거워했었는데. 해마다 축제를 할 만큼 철쭉들의 군락지였던 바래봉을 같이 올랐던 추억, 인월시장에서 맛집 순대국밥을 먹던 일, 옥천 나무시장에서 황금소나무와 반송, 두릅나무를 사오던 일, 남의 집 선산 석축을 쌓는다며 사진을 보내왔던 용감무쌍한 자네의 뚝심과 도전정신,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많았는데, 그저 서너 시간 만에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자네의 육신, 과연 영혼靈魂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어제 하루 동안 손자와 노는데, 요녀석이 넌센스퀴즈를 자꾸 내더군. 한두 가지 들려줄 터이니 자네도 맞춰 보소. “코는 콘데 가장 큰 코는?” “과일장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금은 금인데 먹을 수 있는 금은?” 정답을 아는가? 멕시코, 시드니(시든이), 소금이라네. 이런 수수께끼야 정답을 맞출 수 있지만, 아아- 자네와 나의 길이 이미 갈려버린(곧 같아지겠지만) '생사生死의 수수께끼'만큼은 영원히 풀 수도, 풀릴 수도 없는 문제이니, 내가 잘 쓰는 말로 “자궁이 답답할 뿐이네” 그렇지 않은가. 삼우제 지낸 자네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네. ‘5일 만에 자네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한다’고. 콩 베는 것부터 말리고 타작하여 가마니 쌓아놓고, 콩알 선별하는 사진 몇 장 보내네. 오늘 오후에는 친구라면 '사죽'을 못쓰던 자네의 친구이자 내 친구들을 동대문 진옥화할매닭집에서 만나기로 했다네. 지암, 우보, 고천, 달우, 우재, 우천, 마군사, 여초 등이 그들이네. 자네도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좋아라고 하겠지. 영면하시게, 친구.


 

▲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위원.
▲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위원.

최영록 <전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위원>
1년 전 회사원으로 정년퇴직한 후 고향에 내려와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새살새살 찬샘통신’이라는 생활칼럼을 ‘전라도닷컴’에 연재하고 있다. 전 동아일보 기자,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한국멀티미디어뉴스협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우천이 들려주는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나는 휴머니스트다’, ‘백수의 월요병’, ‘은행잎편지 108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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